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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사

『마르크스주의연구』를 창간하며

 

1989∼1991년 소련·동유럽 블록의 붕괴 이후 한 동안 풍미했던 '자본주의 이외 대안 부재론'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1997∼19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 1999년 시애틀 전투 이후 반자본주의 운동의 대두, 2001년 미국 '신경제' 호황의 붕괴와 심화되는 세계경제위기, 9·11 대미테러, 부시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 이후 고조되는 반전운동 속에서 결정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특히 1999년 시애틀 전투 이후 대두한 반자본주의 운동과 2003년 2·15,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으로 최고조에 도달했던 세계 반전운동은 착취와 억압과 생태계 파괴, 빈곤과 불평등, 파괴와 살육으로 가득 찬 21세기 미국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전면적 문제제기였으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결코 21세기 인류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웅변했다.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전운동은 오늘 세계의 기본 모순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모순으로 인식하고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에서 근본적 대안을 추구하는 고전 맑스주의 전통의 유효성을 입증했다. 오늘날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전운동이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의 구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고전 맑스주의 전통의 재발견과 접목이 필수적이다.

고전 맑스주의 전통은 맑스와 엥겔스가 정초하고,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가 발전시킨 맑스주의 흐름으로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 노동자계급 투쟁의 중심성을 핵심으로 하며,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고전 맑스주의 전통은 오늘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격화시키고 있는 모순의 핵심을 노자대립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모순으로 파악하며, 이와 같은 모순의 근본적 해결을 1999년 시애틀 전투 이후 세계적으로 고양되고 있는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전운동을 조직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결합하는 데서 찾는다.

한국에서 고전 맑스주의의 전통은 대단히 척박했다. 스탈린주의와 반공주의는 그 동안 한국에서 고전 맑스주의 전통의 착근과 발전을 억압해왔다. 스탈린주의는 1980년대 한국사회성격 논쟁 과정에서 맑스주의와 동일시되어 잠깐 득세했지만, 1989∼1991년 소련·동유럽 블록 붕괴 이후 '역사의 종언'과 '맑스주의의 파산'이 선언되면서 각종 포스트주의와 개량주의로 신속하게 전화했다. 그러나 '역사의 종언'과 '맑스주의의 파산' 담론은 단명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한 모순이 전지구적 규모에서 격화되고, 또 이와 같은 모순이 맑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분석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모순이라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맑스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21세기 들어서도 지속되고 있는 '맑스 르네상스' 현상을 지지한다.

하지만 최근의 '맑스 르네상스'는 맑스의 자본주의론은 수용하면서도 맑스의 노동자계급 혁명론은 거부한다는 점에서, 또 맑스로의 복귀를 단지 맑스로만 한정하고, 맑스 이후의 고전 맑스주의 전통까지 연장하여 복귀하는 것은 회피한다는 점에서 불충분하다. 맑스로의 복귀가 맑스의 혁명적 실천을 거세한 맑스의 이론으로의 복귀로만 제한될 경우, '맑스 르네상스'는 1990년대를 풍미했던 각종 포스트주의처럼 일종의 지적 유행으로 되어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강화에 봉사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맑스 르네상스'는 맑스의 혁명적 사상의 부활이어야 하고, 이는 고전 맑스주의 전통의 재발견과 접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1917년 10월'로의 복귀 없는 맑스로의 복귀는 가능하지 않다.

오늘 우리는 21세기 한국의 진보진영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고전 맑스주의 전통의 재창출에 이론적 수준에서 일조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연구』를 창간한다.

『마르크스주의연구』는 맑스의 사상과 고전 맑스주의 전통의 탐구, 맑스주의 방법에 기초한 현대세계와 계급투쟁 분석, 다양한 맑스주의 흐름들간의 논쟁 등의 영역을 중심으로 연구와 토론을 수행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연구』는 한국에서 고전 맑스주의 전통의 발전을 가로막아 왔던 부르주아 지배 이데올로기와 스탈린주의, 각종 포스트주의와 개량주의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 서면서도, 어떤 '일괴암' 같은 '정통'을 자임하지 않고, 다양한 맑스주의 흐름들과의 논쟁과 상호 비판을 장려할 것이다. 고전 맑스주의 전통은 부단한 비판과 논쟁을 통해서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연구』는 다학제적·총체적 접근을 편집의 기본 원칙으로 한다. 고전 맑스주의 전통은 '맑스주의 경제학', '맑스주의 철학', '맑스주의 정치학', '맑스주의 사회학', '맑스주의 문예이론'과 같은 식의 분과학문으로 분화될 수 없다. 고전 맑스주의 전통의 비판적 분석과 변혁의 대상인 자본주의 체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총체이기 때문에, 이 체제의 비판적 분석과 변혁 역시 다학제적·총체적 접근을 통해서만 올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연구』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의 정신을 견지하면서도, 교조주의와 독창성의 억압에 단호히 반대하며, 이론적 수준에서 가능한 최고 수준의 엄밀성과 독창성을 요구하며, 맑스주의에 특화한 고급 전문 학술지를 지향한다.

『마르크스주의연구』는 한국에서 아직도 일천한 고전 맑스주의 전통의 연구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의 구현을 앞당기는 데 진력할 것이다.

 

2003년 8월 19일

『마르크스주의연구』 편집위원회

강내희, 김세균, 박노영, 이성백, 이채언, 장상환, 정성진, 정진상, 최갑수, 최병두